To. 스물일곱의 기진
글 이기진(재능기부)
그림 박정은(재능기부)
스물일곱 살의 기진. 너의 나이를 두고 누가 어리다고 하겠냐마는, 불혹의 나는 마치 부모의 마음처럼 너를 생각하면 애틋하고 조마조마하고 안쓰럽고 또 대견하구나. 그래, 내 마음 속의 너는 여전히 어리거나 혹은 여물지 않은 연둣빛 청춘이다. 혹시 모르지. 네가 좀 더 조숙해서 일찍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거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어엿한 직장에 취직해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했었다면, 아마도 난 너를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기억하지는 않을 거야. 마흔이 다 돼 비로소 가정을 갖고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조금 어른이 된 기분이거든.
너는 스물일곱이 되던 해 중요한 선택을 했다. 앞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그 선택이 네 인생을 크게 변화시키리라는 것을 너도 막연히 느끼고 있고, 그래서 지금 너의 하루하루는 불안감과 모험심으로 충만할 테지.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좋아하고 소질이 있던 너는 미대에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에서 시사만화를 알게 됐고, 졸업 후에 만화를 배우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그야말로 어설픈 만화가가 됐지. 대단치 않은 인맥으로 몇 군데 단체 회지 같은 곳에 만평을 연재하고 온갖 데 삽화 일을 하면서, 비록 가난하고 초라하지만 자유롭고 순수한 청춘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네가 그럴듯한 사회인이 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어색했지. 거대한 사회 집단에 속해 한 개의 나사못이 된다는 것에 너는 거부감을 느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준비가 아직 덜 됐던 것뿐일까. 그렇다면 그때 네가 선택한 유학이라는 길은, 돌파구였을까 도망이었을까. 스물일곱에 너는 1년 동안 어학을 공부하고 저쪽 나라 대학의 시험을 치르며 유학을 준비했고, 다음 해인 스물여덟 살에 떠났지. 한국에서 휴학까지 합쳐 5년이나 대학을 다닌 네가 다시 저쪽 대학의 1학년으로 입학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지금 내가 다시 생각해도 상당히 무모한 일이었어. 다행히 입학해서 보니 너와 비슷한 상황의 동료들이 더러 있었지만 말이야. 솔직히 이것만은 너를 뜯어말리고 좀 더 요령 있는 방안을 찾아볼 것을 조언하고 싶구나. 내가 아는 한 아마 너는 너의 결정을 번복하려 하지 않겠지만, 조금 더 살아보니 우리 인생에는 우회로라는 것이 있더구나. 정통만이 곧 길은 아니라는 거지. 하긴 좀 더 큰 시야에서 보면 유학이라는 것 자체가 네 인생에 우회로이긴 했지만.그러나 나는 언제나 스물일곱의 네 결정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사회를 떠나 적잖이 다른 문화와 방식이 있는 곳으로 건너가, 그곳의 삶에 내 몸을 맞추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란 정말이지 흥미진진한 경험이었어. 막 걸음마를 떼고 어눌한 말을 하기 시작한, 16개월 된 우리 아들을 보면 당시의 네가 떠오른단다. 그건 중독성이 있는 듯했어. 그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자 자연스럽게 또 다시 떠남을 구상했을 정도니까.(비록구상에 그치긴 했지만) 나는 지금도 젊은 후배나 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너의 결심이 인생에 얼마나 멋진 경험을 선물해주었는지 말해주곤 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경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사람의 인생에 특별한 빛을 더해주는 그런 경험 말이야. 난 2008년에 한국에 돌아와서 몇 개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그렇게 2~3년이 흘러갔어. 하지만 흔히 보따리 장사라고 부르는 시간강사 생활에 나는 점점 피폐해졌지. 유학을 결심하기 전에 느꼈던 무력감, 내가 이 사회의 부적응자인것 같은 패배감이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나를 병들게 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이미 너에게 떠남의 미학을 배운 나이기에,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그 세계를 등질 수 있었단다. 능력이 없어서 축출됐다는 편이 더 객관적인 표현이겠지만,그 사실조차 쿨하게 인정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던 건, 바로 너, 스물일곱의 내가 가르쳐준 삶의 처세술이 있었기 때문이지. 지금은 다시 변방에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일의 결과가 아니라 내가 과정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추구하고 버티는지를 실험하는 일이 될 것 같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네 덕분에 남들보다 두 배는 늘어난 청춘 시절을 만끽하고 뒤늦게 꾸린 가정에 대해서도, 너에게 감사해야 할 듯. 내 인생의 반려를 바로 네가 이끌어준 그곳에서 만났고 그리해서 지금의 사랑스러운 가족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나는 인생에서 떠남의 순간이 올 때마나 너를 떠올릴 것이다. 아마 내가 늙고 약해져 있더라도 너는 내 옆에서 용기를 주겠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떠나라고. 그러면 저쪽에는 지금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들과 인간적으로 멋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스물일곱의 너는 씩씩하게 나의 등을 떠밀어주겠지.
스물일곱의 기진, 그런 네가 언제나 고맙다.
from. 2012년의 기진
이기진
2000~2008 일본 교토 세이카 대학교에서만화를, 도시샤 대학교에서 미디어학을 전공
도시샤 대학교 미디어학 박사(2010) 만화 연구/평론가 인문만화교양지 <SYNC> 편집장
<SYNC>에 ‘만화, 미디어 그리고 사회’라는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음 만화번역가
최근 번역작: <우리 마을 이야기> 1~7권, 오제 아키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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