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에게 보내는 편지
글 박희정(재능기부)
그림 박정은(재능기부)
출처 빅이슈 44호
어린 시절의 나에게 편지를 쓰라는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어. 난 지금 서른일곱인데, 지나온 날의 어느 순간에 편지를 보내야 하는 걸까. 어리다는건 어찌 보면 참 막연한 말이잖아. 열 살이면 충분히 어린 걸까? 스무 살이란 나이는? 서른셋쯤 되면 더 이상 어리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되는 나이일까? 그렇다면, 어른이란 무엇일까? 그저 육체적 나이가 들어가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떠올렸지. 내가 ‘어린’ 시절에 세운 꿈에 대해. 선생님, 역사가, 미술가, 만화가… ‘직업’으로서의 꿈은 계속 변해왔지만 , 난 결코 변하지 않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도 하나 가지고 있잖아. 그건 바로 ‘정말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것’이지.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자면, 어린아이들의 지지자가 돼줄 수 있는 지혜롭고 따뜻하며 건강한 정신을 가진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 말이야.
한참 어린 시절부터 넌 항상 어른들에게 불만이 많았지. 네 눈엔 어른들이 오히려 아이들같이 보였으니까. 아이들이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어른들은 자기감정이 앞서면 미칠 듯이 싸워댔지. 항상 상처받은 자신의 기분만 중요해서 네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잖아. 오히려 너는 하소연의 대상이 되곤 했지. 입에 거칠게 욕을 달고 다니며 남의 집에서 새벽까지 화투판을 벌이는 아저씨들도 지겨웠어. 단칸방이라 도망갈 곳도 없을 때였는데, 속으로 ‘제발 좀 가줬으면’ 하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 대장 노릇하고 남 퍼주기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우리 집은 늘 아저씨들로 들끓었잖아. 복날이면 빠짐없이 그들이 먹을 영양탕 냄새가 집에 진동을 했고, 그런 날이면 난 코를 쥐고 집 밖으로 달려 나갔지. ‘때려잡아 맛있다’는 개 한 마리가 시커멓게 그을려 수돗가에 뻣뻣이 누워 있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네가 본보기 삼을 만한 어른들을 만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어. 그러고 보니 난 한때 신심 깊은 기독교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지. ‘아내들은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곱게 화장하고 남편을 맞으라’ ‘아프리카 흑인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몰라 그런 것이다’는 설교 말씀에 지쳐 돌아 나오기 전까지. 사실, 어른들을 원망하는 마음 이면엔 어른들을 존경하고 또 그들에게 사랑받는 관계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 그거 아니? 고래와 사람은 번식 능력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랜 기간 생존하잖아. 일반적인 생물들의 경향성과는 좀 다른데, 고래에 생태에 관한 책에서 그 의미에 대해 해석하기를, 진화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생식을 통해 종족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지혜’를 전수해주는 것이 종족의 번성에 더 효과적이라고 인지한 결과라고 해. 다시 말하면,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좀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전수해주는 것이 존재의 의미이자 의무라는 말이 되는 거겠지.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된다면, ‘지혜’를 전수받는 입장에서 젊은이가 어른을 존경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이때 ‘번성’이라는 말은 인간 세계에서 단순히 수적인 증가를 의미하는 건 아닐 거야. 질적으로 인간 사회가변화할 수 있다는 거지. 인권이나 민주주의도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힘겹게 쌓아 올려가야 하는 것이잖아. 결국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는 네 꿈은 너 자신과 인간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열망을 담고 있는 거야. 응? 그래서 지금 나는 좋은 어른이 된 것 같으냐고? 글쎄… 그래도 십 대, 이십 대 때보다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이 편지가 네게 닿는다면, 시행 착오의 시간을 조금은 줄일 수 있도록 몇 가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야. 매일 자신에게 이야기해줘. 넌 귀한 사람이다. 난 네가 좋아. 자존감을 갖는 것은 자만심에 취하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것과는 구분해야 해. 결코 타인과 너를 비교하지 마. 네가 귀하니까 모두 귀한 거야. 모두가 귀한 존재니까 너도 귀한 존재야. 네가 남들과 다르게 귀한 존재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 타인을 낮게 여기려는 마음과 같은 거지. 또한 자신을 사랑하되, 엄격할 필요가 있어. 엄격하다는 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야. ‘남의 눈에 티끌은 봐도 내 눈에 들보는 못 본다’고 하잖아. 모든 종교에서 자기 성찰과 사랑을 강조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게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길인데, 인간이 지키기는 참 어려운 거지. 그러니까 노력해보자고. 그리고 항상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대함을 잃지 말기를바라. 관대함은 무턱대고 용서하라는 의미는 아니야. 비판적이되,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또 변화 가능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거지. 용서를 빌었을 때는 따뜻하게 용서해줘야 하고. 또 때로는 네가 먼저 다가가 그들에게 용서받을 기회를 주어야 하기도 해.
못 견디게 힘이 들 때면,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우리는 항상 과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렴. 실패해도 괜찮고, 못해도 괜찮아. 순간에 집중하고,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지 마. 결과에 매달리면 지칠 수밖에 없어. 변화는 점진적이라 눈에 보이기 어렵고, 또 어떨 때는 퇴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 어떤 일의 의미는 훨씬 나중에야 깨닫게 되기도 해. 그럴 때는 네가 세운 원칙을 놓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믿고 용기를 주렴.
아마, 넌 지금 많이 힘들 거야. 고민만 늘고 해답은 보이지 않겠지. 발목 잡는 것투성이에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할 테고. 얼마 전부터 항상 불안하고 어지러운 마음이 들면, 주문처럼 입 속에서 되뇌는 말이 있어. 그러면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진다. 이 말을 끝으로 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칠게.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것은 반드시 바른 길을 향하게 돼 있다는 말이야.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즐거움도, 시간 속에서 흘러간다. 뜻을 세운 방향이 옳다면, 너는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거야.
form. 2012년 희정
박희정
여성주의저널 <일다> 편집장
'이벤트 > 독자 참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회 서울 나눔천사 자원봉사 페스티벌_빅이슈 자원봉사자 모집합니다. (0) | 2013.10.21 |
---|---|
45호 <어릴 적 나에게 보내는 편지> To.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의 석훈 (0) | 2012.10.08 |
44호 <어릴 적 나에게 보내는 편지> To. 어린 희정 (0) | 2012.09.20 |
43호 <어릴 적 나에게 보내는 편지> To. 스물일곱의 기진 (0) | 2012.09.04 |
41호 <나의 첫> '사회인' 맨발로 나가는 사회 (0) | 2012.08.07 |
40호 <어릴 적 나에게 보내는 편지> To. 1993년의 열아홉 살 진혁 (0) | 2012.07.26 |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