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제, 만났습니다
이용대, 고성현
두 남자가 있다. 시종일관 자동으로 착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남자와 아직은 입을 앙다무는 게 조금 더 익숙한 남자.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는 남자와 아무렇지 않은듯 농담을 툭툭 던지는 남자. 하지만 성격도, 표현 방식도 다른 이 두 남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함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사진작가가 주문한다. “용대 씨, 사진 찍을 때 너무 착하게만 웃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 그리고 성현 씨, 스튜디오에서 점프할 때는 꼭 그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하지 않아도 돼요” 서로 다르게 주어지는 주문에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두 남자. 서로 달라서 ‘잃어버린 반쪽’임을 알아본 두 남자. 한국 배드민턴 간판스타 이용대(25, 삼성전기)와 고성현(26, 김천시청)을 만났다.
글 구민정(재능기부) 사진 INDIAN CHIP(재능기부)
메이크업 최승희(재능기부, MUSAI 1st),
헤어 김효진(재능기부, MUSAI 1st)
스타일리스트 윤은영 어시스트 장채련 이서영
의상협찬 니나리치 맨, 디젤, 블랙톱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용대와 고성현은 지난해 10월쯤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지금껏 이들이 동거’한 기간은 단 5개월.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위기가 닥칠수록 머리가 차가워지는 이용대와 국내 최고의 파워 스매싱을 자랑하는 강한 남자 고성현.(고성현의 스매싱 속도는 약 300~310㎞다) 이들은 서로의 다름이 축복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덕분일까. 이들은 지난해 10월 덴마크오픈에서는 1회전 탈락이라는 쓴잔을 마셨지만 곧이어 프랑스오픈에서는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올해 1월, 말레이시아오픈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배드민턴 세계 랭킹 3위로 올라섰다. 이토록 빨리 첫 호흡의 실패를 만회한 이 커플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이용대(이하 ‘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선수들 중에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레이시아 오픈 전, 올해 1월에 열린 코리아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바로 이어진 말레이시아오픈에서 준우승을 한 거죠. 사실 아쉬운 점도 있고 보완해야할 점도 있었어요. 다음 시합도 많이 있으니까, 나중에 만나면 꼭 이길 수 있게 더 연습해야죠. 서로 호흡이 잘 맞아요. 덕분에 생각보다 랭킹이 빨리 올라가서 만족스러워요. 성현 형과 제가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니까 가깝게 지내면서 훈련도 재미있게 하려고 늘 노력해요. 그러다 보니 믿음이 쌓였어요.
사실 이용대와 고성현이 최고의 조합을 이룰 것이란 전망은 배드민턴계에서 예전부터 줄곧 나온 얘기였다. 파워가 강해 뒤에서 공격을 담당해주면 좋을 고성현과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네트 앞에서 치밀한 플레이를 펼치는 이용대가 만난다면, 그야말로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는 짝이 되리란 얘기였다.
처음부터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한 채 복식조로 출전해 맛본 ‘1회전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은 역설적으로 이들에게 힘이 돼줬다.
이 처음에 같이 호흡을 맞춘 게 덴마크오픈이었는데 1회전 탈락을 했어요. 그때 굉장히 상심했어요.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그 덕분에 오히려 프랑스오픈에서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고배를 맛본 후, 찬찬히 문제점을 짚어나갔다. 문제는, 대화였다. 경기 도중 코트 안에서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 살 어린 이용대는 가끔 고성현이 너무 경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형을 진정
시켜가며 경기를 이끌어나갔다. 이제 이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고성현(이하 ‘고’) 힘은 자신 있습니다!(웃음) 저는 파워 면에서는 장점을 갖고 있는데 약한 공이나 네트플레이에 약해요. 그걸 용대가 보완해줘요. 용대가 경기할 때 리드를 하고 제가 따라가는 방식인 거죠. 용대가 잘해주니까 그런 부분에서 시합 때도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 저는 파워 면에서 좀 부족한데 그 부족한 걸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성현이 형 이에요. 제가 (기회를) 만들어주면 성현이 형이 결정을 지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괜찮아, ‘멘붕’하지 마, 일단 잠시 멈춰봐
골프에는 ‘입스(yips)’라는 것이 있다. 과거에 큰 실수를 한 트라우마가 있거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긴장한 나머지 퍼팅을 못 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배드민턴도 마찬가지다. 간혹 중요한 순간, 서브를 못 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선수가 있다. 그런 ‘마음의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은퇴하는 선수도 있다. 마음이 무너지면 스포츠도 없다는 뜻이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사고정지(thought stopping)’를 할 줄 아는 능력이다. 사고정지란 경기 도중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라 불안에 사로잡힐 때, 거기서 생각을 일단 끊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서비스 실수를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 가슴의 태극기를 한번 만진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것이다. 이용대와 고성현은 이미 자신들만의 주문을 갖고 있었다.
고 안 풀리면 좀 더 움직여보자고 스스로 생각해요. 많이 움직이다 보면 편한 지점에서 볼을 칠 수 있거든요. ‘더 뛰면서 하자’ 이런 생각을 해요. 그리고 너무 급하게 플레이하게 될 때는 ‘천천히 하자, 천천히 하자’ 이렇게 혼잣말을 하죠.
이 저도 성현 형처럼 혼잣말을 해요.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들은 서로의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고 저는 자존심도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에요. 어쩔 수 없이 지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시합에 임하죠. 그런데 그게 지나쳐서 제가 흥분을 좀 잘하거든요. 그리고 흥분하면 공을 강하게만 치려는 버릇이 있어요. 그러면 용대가 옆에서 차분하게 얘기하면서 브레이크를 밟아줘요. 약하게 쳐도 되니까 정확하게 해달라고 주문을 해주죠. 그 말을 듣고 나면, 저도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에 집중할 수 있어요.
이 제가 경기 흐름을 잡는 데 많이 노력하는 편이에요. 물론 저 또한 급해질 때도 있죠. 그러면 그때는 또 성현이 형이 저를 잡아줘요.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안 돼요. 긴장하면 위축돼서 플레이가 소극적으로 변하거든요. 긴장감을 풀고 적극적으로 나가야죠.
긴장은 나쁘다. 긴장을 하면 ‘얼음’이 돼 몸이 굳기 때문이다. 긴장이 나쁜 이유를 하나 더 들 수 있다. 스포츠 전문가들에 의하면, 긴장한 선수는‘보수적으로’ 경기에 임하게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선수 개인이 지니고 있는 경기 진행의 ‘버릇’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평소에 편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안전하게 경기를 이끌고 가려는 의도에서 그 버릇들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는 전투에서 상대방에게 수를 고스란히 읽히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면 선수들은 상대 선수가 경기하는 습관을 이미 다 알고 있고, 그 습관대로 펼쳐지는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장하면 경기를 전략적으로 이끌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 ‘멘붕’하면 안 된다. 마음이 편안해야 주도적으로 경기의 흐름을 잡을 수 있다. 선수들은 온 마음으로 경기에 몰입하는 경우, 셔틀콕이 수박만 해 보일 때도 있다고 말한다. 결국 모든 운동경기는 기예 겨루기에 마음 다스리기가 더해지는 셈이다. 그래서 이용대와 고성현은, 그토록 많은 대화를 하며 서로의 마음을 끊임없이 챙긴다. 경기장 안에서도, 밖에서도.
약수터에서 누구나 치는 배드민턴처럼, 시작은 그렇게 왔다
물론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 세계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과정은 때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이들이 꼽은 ‘내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는 어떻게든 ‘배드민턴’이란 단어가 들어 있다.
이 올림픽 준비할 때가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장 힘들었어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혼합복식 금메달을 땄던 때였어요. 팔꿈치를 다쳤을 때나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릴 때마다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됐죠. ‘역시 나는 배드민턴을 해야 행복하구나, 배드민턴 할 때가 좋았던 거구나’ 하고요. 한번 다쳐보니까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 저는 좀 늦게 대학생 때 국가대표팀에 들어갔거든요. 그렇다 보니 처음에 파트너와 연습하면서 실력도 많이 올라가지 않았고, 그래서 훈련도 여자 선수들과 하고 그랬어요. 그때 스트레스 많이 받고 힘들었습니다. 막상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니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더 넓은 곳을 보면서 ‘대표팀 생활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행복했던 순간은 오픈 대회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 ‘이젠 나도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구나’ 하는 마음에 기쁘고 뿌듯했어요. 그런 걸 느끼고 나니까 배드민턴이 더 재미있어졌어요. 그게 대학교 4학년 때거든요. 지금까지도 재미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재미있진 않았는데. 하면 할수록 재미있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배드민턴, 모르고 안 했더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지만 막상 이들이 처음 라켓을 잡게 된 것은 ‘그냥’ 그렇게 된 일이었다.
고 초등학교 다닐 때, 운동부가 배드민턴부밖에 없었어요.
이 저도 그랬어요.(웃음) 운동을 좋아했는데 시골이라서 배드민턴밖에 할 수 없었거든요.
고 처음에 장난삼아 쳐보라고 제 손에 쥐어주던 라켓이 생각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속초에서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이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남들보다 좀 일찍 시작한 셈이죠. 그런데 사실 처음엔, 살을 빼려고 시작한 거였어요. 제가 또래에 비해서 뚱뚱했거든요. 그래서 정말 취미로 시작했어요. 3, 4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하게 됐죠.
그러다 운명의 순간이 왔다. 배드민턴의 힘듦과 프로가 돼야겠다는 결심이 함께 찾아온 것이다.
이 중학교 2, 3학년 정도 되니까 ‘배드민턴을 더 열심히 해봐야겠구나. 내가 잘하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늘 재미있지만은 않았어요. 그땐 정말 힘들어서 ‘어떻게 버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버텼던 게 지금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고 중학생이 되니까 공부 쪽으로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공부보다는 운동이 더 하고 싶었어요. 어려서부터 밖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했거든요.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컴퓨터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늘 밖에서
뛰어놀았고, 그러다 보니 또래 중에서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산이며 저수지를 쏘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처음 배드민턴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한시도 배드민턴을 잊어본 적이 없는 두 남자.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고 새해 소망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거예요. 거기서는 우승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준비도 많이 하려고 해요.
부러운 놈, 같이 있고 싶은 놈
마지막으로 이용대에게 고성현은 무엇인지, 고성현에게 이용대는 무엇인지, 다소 낯 뜨거운 빈칸 채우기 식의 질문을 던졌다.
고 ‘고성현에게 이용대는 부러운 놈이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금메달을 땄잖아요. 가끔 좀 질투가 나기도 해요. 그래서 더 이기고 싶죠.(웃음)
이 ‘이용대에게 고성현은 동반자다!’ 늘 같이 다녀야 하고, 가족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요. 경기장에서도 그렇지만 밥도 같이 먹고 항상 같은 공간에서 잠들고요. 그리고 가끔 주말엔, 맥주도 같이 한잔!
아직 이 커플이 안정 궤도에 올랐다고 보기엔 이르다. 인터뷰가 끝난 직후에 치러진 2013 슈퍼시리즈 프리미어 시즌 첫 대회인 전영오픈에서 32강전 탈락의 아쉬움을 남긴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도 이르다. 짝이 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세계 랭킹 152위에서 3위까지 오르는 저력을 보여줄 정도로 서로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자랑하는 이들의 호흡은 5월에 있을 ‘2013 세계 혼합단체 배드민턴 선수권대회’를 향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트에서 오랫
동안, 그리고 코트 바깥에서는 더 오랫동안, 이들은 함께할 것이다. 사진을 찍는 동안, 이용대는 형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고성현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마침내 둘의 안면 근육은 완전히 이완됐다. 사진을 더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
쉬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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