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마스크 너머의 뜨거운 세계
“참으로 그림 같은 미공자시군요”
한참 고전문학을 공부할 때 자주 보았던 표현이다. 별 감흥 없는 관용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2NE1의 ‘아파’ 뮤직 비디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수혁은 그 길지 않은 순간에아픈 느낌을 너무나 아프게 전달하고 있었다. 대체 저 수묵화같이 음영이 짙고 동시에 22세기적인 모던함이 공존하는 마스크라니, 화폭이나 꿈에서 걸어 나온 게 아닌가 했다. 얼마 전 ‘스타일 미니츠(Style minutes)’가 선정한 뉴페이스 13인에 선정된 이수혁의 얼굴, 열일곱 살부터 런웨이를 걸어서 지금은 런던과 파리까지 다다른 얼굴, 스크린과 브라운관에떠오를 때마다 잊히지 않던 그 얼굴 너머가 궁금했다.
글 정세랑(재능기부) 사진 INDIAN BOB(재능기부)
헤어·메이크업 임정호 스타일리스트 강은수
의상 김서룡옴므, 곽현주컬렉션
인터뷰 당일, 긴장돼서 약속된 스튜디오에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당황하고 말았다. 이수혁은 더 일찍 와서 이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준비가 다 된 상태였다.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 오더니, 운동선수처럼 몸을 풀었다. 그 폼이 마치 수영 선수 같았다. 하긴 이수혁의 첫 영화 <이파네마 소년>에서 수영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바다 수영에서 속도를 내기란 웬만해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어릴 때 수영이랑 태권도, 스케이트를 배웠었어요. 그중 수영을 제일 오래 했는데 첫 영화가 수영하는 영화여서 좋은 기회였죠. 큰 영화가 아니어서 대역도 없고 안전 장비도 없었거든요. 정말로 혼자서 바다 한가운데, 고등어가 튀어 오르는 데까지 가봤어요”
어릴 때라니, 왠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수혁은 어째선지 지금 모습 그대로 태어났을 것 같았기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어요. 만날 혼자 레고만 하고,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뛰어가고. 뭐든 주도적으로 하는 성격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눈에 띄지 않았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모두 갸우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사진작가는 자기도 모르게 ‘아름답다’고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카메라에서 컴퓨터로 전송되는 사진들을 보자니 정말 사진을 고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버리는 게 문제였겠구나 싶었다. 이수혁은 한순간도 똑같은 포즈를 잡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넘칠 뿐 아니라 시원시원하게 소통하고 의논하고 아이디어를 냈다. 열정적인 사람이구나 싶었다.
촬영장 한쪽에 이수혁의 커다란 신발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사이즈가 285라 했다. 섬세한 이미지 때문에 얼마나 키가 큰지, 발이 큰지 생각을 못 하다가 직접 보니 달랐다. 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의 성격이 어떤지 물어봤다.
“그냥 남자애 같아요. 딥하거나 진하지도 않고. 카메라 앞에서는 이상하게 잘 못 웃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이수혁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가 ‘웃는 사진’이다. 얼마나 웃는 사진이 귀하면 팬들이 찾아 헤맨단 말인가. 실제 만나본 이수혁은 아주 잘 웃는 사람이었다. 포즈를 잡다가 중심이 흔들리면 웃고, 사진작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웃고, 팀 사람들과도 자주 웃고. 촬영장을 환하게 밝히는 그 웃음을 훔쳐다가 팬들에게 선물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째서 일상을, 편안한 공기의 일상을 더공개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저는 타고난 게 SNS랑 정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트위터를 만든 것도 외국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자기 어필도 해야 하고, 휴대전화 쓰기가 불편한데 그쪽 친구들이랑 연락은 해야 하고 그래서 만든 거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어려워요. 생각이나 의견을 쓰는 것도, 일상을 공개하는 것도 아직은 편하지 않아요. 왜냐면 제 생각은 계속 변하고 있거든요. 경험을 하고 새로운 걸 마주치면서 자꾸변하니까, 유동적이니까”
이수혁은 솔직했다. 돌려 말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트위터도 더 솔직히 말하면, 이수혁을 사칭하는 계정이 개인적인 메시지를 마구 보내는 등 상황이 이상해져서 만들기로 결정한 것도 있다고 했다. 그의 일상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아주 병적으로 비틀린 사례가 아닌가 한다. 하여튼 트위터만큼 과묵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짧고 감각 있게 말할 뿐 결코 말이 없진 않았다. 가리는 것 없이 음식도 잘 먹고 활달한 사람인데, 자기 노출에 민감한 것은 많지 않은 나이 때부터 프로로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 일을 시작한 게 열일곱 살이었어요. 뭘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했어요. 어렸고, 예뻐해주셨으니까, 운이 좋았으니까. 그때는 사회생활이 뭔지도 모르고 했는데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아요. 얼마나 혜택을 받았던 건지 모델 일을 쉬면서 뒤늦게 깨달았어요. 모델 일을 아무것도 모른 채 수월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연기자로 시작하는 와중엔 부족함을 많이 느꼈고 계속 느끼고 있어요. 특히 선배들과 하는 작업에 서 더 심하게요. 모델도 그렇고 배우도 그렇잖아요. 쓰임을 당하는 일이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잘해내야 다음 기회가 또 오죠"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영화의 모든 것을 내 안에 담는 것이 이다. 지금은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배우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에너지가 쌓이고 있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을 수 있는 작품을 빨리 만나고 싶다”
프로로서의 모습 말고, 카메라 앞에서의 시간 말고 평소의 쉬는 모습이 궁금했다. 바쁘게 달려온 그도 느슨할 때가 있었는지.
“연기 준비를 하면서 너무 강한 이미지를 빼려고 모델 일을 쉬었을 때가 제일 길게 쉬었던 때 같아요. 하지만 쉴 때 별거 안 해요.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여행 다니고. 영화를 정말 장르 안 가리고 봐요. 호러 영화만 빼고 다 봐요. 무서워서는 아니고, 어째선지 호러 영화에는 끌리지 않더라고요. 반면에 스릴러는 진짜 좋아해요. 영화를 고를 땐 좋아하는 감독들의 작품을 빠뜨리지 않고 보려고 해요”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는 꿈이 영화라고 했다. 좋아하는 감독들과 작품들을 열거하는 이수혁의 목소리에서 애정과 흥분과 간절함과 즐거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지금은 연기를 하고 싶지만,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영화계에 머무르고 싶어요. 감독을 하겠다는 포부 같은 게 아니라, 영화 미술이 되었든 의상이 되었든 공부를 더 해서 영화계에 오래 머물고 싶어요. 학교에 가는 것은 아직 좀 이르다고 생각해 미루고 있지만, 언젠가는 갈 거예요”
이수혁의 꿈은 영화의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전체를 품고 있지만, 일단 팬의 입장에서는 그의 연기를 더 보고 싶은 게 먼저다. <이파네마 소년>에서도 <차형사>에서도, 출연한 드라마들에서도 이수혁의 순간적인 표현력은 카메라에 짧게 잡힐 때조차 두드러졌었기 때문이다. 보디랭귀지라든지 표정, 몸의 각도만으로도 정말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영화가 남자 영화류가 많아서 그런지 나쁜 역할에 끌려요. 스릴러 영화에서 지독한 악당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아, 그리고… 나이가 아직 어리긴 해도, 기다리다 보니까 이십 대 초반의 역할이없어져버렸어요. 더 늦기 전에 꼭 해보고 싶어요. 점점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목표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맞는 옷을 입고 싶어요. 이것저것 다 잘해낼 수 있는 역량은 아직 저 스스로도 못 느껴서요. 꼭 맞는 옷을 입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꼭 맞는 옷’이라는 말을 인터뷰하는 동안 여러 번했다. 몸에 자연스럽게 익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아 더 와 닿았다. 연기와 영화에 대한 애정만큼 이나 여전히 이어져 있는 패션과 모델 일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었다.
“이번에 런던과 파리 쇼에 섰던 게 생각보다 잘돼서 기뻤어요. 사실 걱정 많이 하고 갔었거든요. 5년 전에 갔을 때는 아시아 모델이나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아쉬웠었는데 이번에는 달랐어요. 저는 막상 잘 몰랐지만 선배들한테 듣고 보니 ‘스타일 미니츠’의 뉴페이스 13인 선정도 중요한 거 였더라고요. 모델로서 뭔가 다하지 못했다, 아쉬웠다 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풀고 왔어요. 아무도 없이 혼자 갔거든요. 특히 파리에선 한 달 동안 혼자 조그만, 정말 귀여운 아파트를 빌려서 있었던게 좋았어요. 여기 있을 때는 아무래도 일 문제로 마음이 쉽게 조급해지는데, 그런 게 많이 없어져서 돌아왔어요”
눈앞의 꿈과 조금 더 멀리 있는 꿈들에 대해서 물었다. 계획이라 부르고 꿈으로 간직하는 것들에대해.
“뭔가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에너지가 막 몸 안에 쌓이는 기분이에요. 촬영이 없고 일을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요. 보는 것도 많고 피는 끓고 에너지는 쌓이는데 표출할 데가 없으니까 가구를 만들까, 그림을 그릴까…. 우리를 드러낼 수 있는 걸 찾자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과 이야기도 많이해요. 그런 에너지를 다 쏟아부을 수 있는 제 인생의 대표작을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만나고 싶어요. 조금 길게는, 이번에 오스카상을 받고 기뻐했던 벤 애플렉의 모습을 보며 ‘정말 좋아 보인다, 저럴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벤 애플렉은 배우로서 부침이 조금 있었지만 영화계에 남아 이번처럼 멋진 걸 만들어냈잖아요”
슬쩍 연애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이십 대 중반의 연애, 그대로인 것도 있고 변한 것도 있을 것 같았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연애할 때 재밌게 노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요. 사람에 대해서 배우고 싶고, 저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분야에 대해 배우고 싶고….서로 자극을 주고받는 관계면 좋겠어요”
우리는 강렬하기만 한 마스크에 얼마나 쉽게 질리는가. 이수혁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가 끊임없이 이수혁에게 반하고, 다음 행보를 궁금해하고, 소소한 디테일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이수혁의 마스크 때문이 아니다. 마스크 너머의 에너지, 세계관, 꿈, 뭐라 불러도 좋을 온도와 밀도 높은 바로 그것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조만간 어떤 완벽한 순간, 배역, 기회를 만나 순식간에 폭발할 테고 그러면 지금 이 인터뷰를 읽고 있는 이들은 ‘예상하고 기대하고 응원했다’고 비밀스럽게 만족할 것이다.B
이수혁
생년월일 1988년 5월 31일
데뷔 2006년 정욱준 Lone Costume 패션쇼
출연 방송 <세븐 모델즈 스페셜 에디션>, <드라마 스페셜 연작시리즈-화이트 크리스마스>, <뿌리깊은 나무>, <왓츠업>, <뱀파이어 아이돌>, 영화 <투사부일체>, <이파네마 소년>,<차형사>
수상
2007 한국패션사진가협회 남자모델 신인상
2008 제25회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스완어워드 모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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