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호는 루시아의 싸이월드 공식 팬클럽 ‘자기만의 방’에서 주인공은 ‘루시아’, ‘그런 계절’의 내용으로 글을
의뢰하셨습니다.(루시아의 싸이월드 공식 팬클럽 ‘자기만의 방’은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에 기부하셨습니다) ]
그런 계절
글 노동효(재능기부)
기억하세요? 10년 전 8월, 둘째 토요일 저녁 7시.
초록빛 잔디광장엔 꽃무더기처럼 5만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당신은 무대 위에 서 있었어요.
당신은 이름을 밝히기 부끄럽다며 닉네임으로 자신을 소개했지요. 루시아. 지금도 떠올릴 수 있
어요. 얇은 티셔츠를 입은 어른들, 알록달록 파자마 차림의 아이들, 하얀 초를 가슴에 안고 꽃처
럼 피어나던 여름에 아홉 번째 자유발언자로 나선 당신의 목소리. 존 레논의 아내였던 오노 요꼬
의 말을 인용했지요. 한 사람이 꾸는 꿈은 단지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꽃잎처
럼 떨리던 음성 위로 암술처럼 꼿꼿이 일어서던 결기. 당신은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 소리쳤지요.
국정원을 개혁하라!
광장은 달의 인력처럼 사람들의 심장에서 일렁이는 열정을 끌어당겨 촛불의 파도를 일으킬 것 같
았지요. 그러나 파도는 현실로 번지지 못하고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멈춰 섰어요. 서울, 대전, 전
주, 광주, 대구, 부산 전국의 수많은 광장에서 피었던 꽃무더기가 지는 건 선운사 동백이 지듯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어요. 마치 비커의 물을 천천히 데우면 개구리가 미처 눈치채기도 전
에 삶아져 죽듯이 무섭고도 느린 변화였어요. 감시와 억압의 온도는 서서히 올랐고 그래서 우리
는 눈치채지 못했죠. 하루하루 온도가 달라져 어느새 계절이 바뀌듯 촛불을 든 사람들 한 점, 한
점 사라지다 찬란한 시절 다 보낸 여름 이파리처럼 어딘가로 불어가고 아무도 남지 않았던 겨울.
그렇게 꽃무더기는 꽃다발로 쪼그라들더니 봄이 와도 꽃피지 않는 땅이 되었어요. 텅 빈 광장 .
촛불이 사라진 자리엔 체포, 재판, 투옥의 수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촛불을 든 사람이 마지
막으로 나타난 건 2016년 4월 1일 저녁 7시였어요. 오랫동안 광장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한 트
친이 “2년 만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 촛불이 켜지다”라고 올린 글을 봤을 때 만우절 농담 같은 건
줄 알았어요. 환호의 표시조차 의심받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팔로우들은 조심스레 문장부호
로 댓글을 달았죠.
?
!!
???
팔로우들의 물음표에 대한 응답으로 잠시 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동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시청
앞 서울광장, 연둣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홀로 촛불을 든 채.
애닳도록 아름다워서 그만
고개를 떨구는 다시 그런 계절입니다
숨이 턱턱 막히매 가슴을 치는
나와 당신께 이 봄은, 겨울보다 더 시립니다
수많은 약속들이 하나둘씩
햇빛에 산산이 부서져
벚꽃잎처럼 허공에 멍들고
시선 가닿는 곳마다
터트려지는 저 눈부신 봄 망울
입술 깨물고 길 걷게 만드는
형벌 같은 이 봄
애닳도록 아름다워서 그만
고개를 떨구는 봄은 그런 계절입니다
숨이 턱턱 막히매 가슴을 치는
나와 당신께 이 봄은, 봄은 그런 계절입니다
그런 계절입니다
당신을 본 지 3년이 지났지만 촛불을 든 사람이 당신, 루시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
본 그때처럼 묵주가 손목에서 반짝이고 있었지요. 트위터에 올라온 영상은 10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트친의 트위터에는 그날 이후 어떤 글도 올라오지 않았지요. 당신은 어떻
게 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 대해 루시아라는 닉네임밖에 알지 못하니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지요. 다음 날 중앙일간지 A면엔 새 대통령과 전임 대통령이 기업인들과 만찬을
나누며 웃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AGAIN 2013> 영상 속 당신이 들고 있던, 촛불을 감싼 종이컵에 씌어 있던 단어. 인터넷에 접
속해 10년 전 무렵 기사를 찾아 봅니다… 국정원 불법선거운동 공방 밤샘 대치… 박근혜 “국정원
의혹, 모략일 땐 책임져라”… 국정원 댓글 동원 의심 수백 명 정보, 포털서 확인… NLL 포기 발
언 맞다… 성공한 쿠데타와 성공한 선거공작… 내란음모 사건 후폭풍, 쪼그라든 촛불… 아, 10년
전 오늘 자 뉴스엔 <하루 평균 80번 CCTV에 찍힌다>는 기사가 올라왔군요.
그 무렵 광장에서 촛불을 켜는 대신, 거실에서 TV를 켜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그 결과가
초래할 미래를 짐작하지 못했고, CCTV에 찍히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
이지 않았습니다. 2017년 국정원이 전국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정치인을 사찰해온 의혹이 일
기 전까지는. 물의가 일었지만 그것도 잠깐. 한 야당 정치인이 내연녀를 만나는 CCTV 장면이 종
편을 통해 방송되면서 사건은 묻혔습니다. 그 후 국정원은 공공연하게 CCTV로 민간인을 사찰
했고 지금은 하루 평균 200번, CCTV에 찍히며 살아가는 세상. 200이라는 횟수도 <세계의 범죄
예방시스템>을 소개하던 외신이 한국 사정을 3년 전에 소개한 것일 뿐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자주
CCTV에 찍히며 살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매주 광장에서 새로운 이슈의 촛불이 켜지던 시절엔 주말이면 극장을 가듯 참석할 수 있는 자리
라 몰랐습니다. 촛불이 곧 자유라는 것을,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는 토양이란 것을. 지난 세기
죽어갔던 수많은 열사들이 원했던 게 광장에서 초를 밝힐 수 있는 시대였다는 것을. ‘나도 그 시
대에 태어났다면 언제든 목숨 걸고 저항했을 거’라 장담하던 이들이 막상 촛불이 한 점 남김없이
사라지자 조용히 숨을 죽였습니다. 지난 세기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이 흘린 피로 밝히게 된 촛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을 때 이미 불은 꺼지고 콘크리
트가 덮여 있었지요. 이제 사람들은 새롭게,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온갖 불의가 벌어지는 땅일
지라도 가만히 있으면 제 가족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만히만 있으면 국민소
득 3만 불의 세상을 누리며 여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촛불과 함께, 지난 수십 년에 걸
쳐 성취한 모든 걸 다시 내놓아야 했습니다.
당신을 본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이젠 촛불이 광장을 뒤덮던 그런 계절이 있었다는 게 꿈결 같
습니다.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이지만 모든 사람이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도 꿈결 같습니
다. 그러나 한때 자유를 경험했던 그날들을 차마 잊을 수는 없습니다.
루시아, 내일 당신을 만나러 갈 생각입니다, 하얀 초를 품에 안고 꽃처럼 피어나던 그런 계절을
꿈꾸며. 어두운 길, 촛불이 당신에게 안내해줄 것입니다.
2023년 9월
- 야이 씹새꺄, 이거 네가 쓴 거 맞지? IP 194.158.31.06. 네 집, 네 컴퓨터에 새벽 1시 16분 34
초에 저장된 글이야. 루시아, 이 년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노동효
2년 주기로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장기체류 후 이동하는 기술을 연마 중.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외 네 권의 여행서를 썼다.
www.facebook.com/dhr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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