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1993년의 열아홉 살 진혁
글 김진혁(재능기부)
그림 박정은(재능기부)
좀 냉소적인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 나는 ‘멘토’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슨 막돼먹은 자존심이었는지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자기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늘 살았던 어릴 적 나에게 지금의 나라고 무슨 수로 경청을 하게 만들 수 있을까? 더구나 논리적이고자 하면서도 늘 직관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을 일삼던 어릴 적 나의 불안정함을 이제는 극복했다 할 수도 없고, 그때보다 무언가가 대단히 나아졌다거나 발전했다거나 이런 느낌이 드는것도 아닌 상태에서 솔직히 어릴 적 내게 지금의 내가 ‘멘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도대체 어릴 적 나에게 나는 어떤 편지를 써야 할까?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지금의 내가 어떤 처지인지, 20여 년의 세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분명 흥미로워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20여 년이 지난 후의 네 모습에 대해 가감(?)없이 이야기를 해주마.
우선 가장 중요한 사실. 너는 20여 년이 지나 무려 나이가 서른아홉이나 돼 있다! 하하하… 그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믿기지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시간은 그렇게 가더라. 하지만 너무 아쉬워하진 말아라. 넌 서른아홉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다! 심지어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만나서 결혼생활을 잘 이어나가고 있고, 직장 생활도 하고 있고, 또 일하는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있단다. 무엇보다 그 ‘일’이란 건 네가 꿈꾸던 것과 비슷한 일이다. 그래 맞아. 한마디로 얘기하면 너의 20년 후는 적어도 나쁘지는 않다. 아니 지금 네가 예상하는 미래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은 거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었냐고? 글쎄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네가 지금 그러하듯 좌충우돌하다 보니까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아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냥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계속 사는 걸 멈추지 않긴 했지 . 물론 나름 계획적으로 살려고 노력은 했는데, 재능 부족인지 노력 부족인지 잘 안 되더라. 맞아, 지금의 네가 가장 너 자신에게 화가 나는 바로 그 ‘대책 없는 태도’ 그대로 살았지. 불안정함, 충동, 지나치게 큰 감정의 기복, 폐쇄적 사회성 그리고 ‘지 잘난 맛’ 같은 걸 나이가 들어서도 극복하지도 통제해내지도 못했다.
근데, 그렇게 살다 보니 얻는 것도 있더라. 뭐랄까 그렇게 살아도 생각보다 대단히 크게 잘못(?)되지는 않는다는 경험이랄까? 맞아, 계획대로 착착 살아내지 않으면 쫄딱 망한다는 투의 이야기들은 확실한 뻥이라는 건 알게 됐지. 또 삶에서 결정적인 기회와 선택은 계획과 무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애초에 삶이란 게 계획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더라. 그러니 지금 너의 좌충우돌이 잘하는 짓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됐다고 보기도 어려운 거야.
아니 어떤 면에선 그 좌충우돌이 지금 내가 방송 PD가 돼 만드는 프로그램의 많은 소재이자 주제들로 활용(?)되고 있어. 그러니까 바로 지금 네가 지금 그토록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것들을 가지고 내가 프로그램에 잘 써먹으면서 살고 있단 말이지. 좀 염치없는 말이긴 하지만 고맙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계속 고생 좀 해라. 지금의 나도 좀 먹고 살아야지 않겠냐?
물론 모든 게 다 좋은 건 아니야. 네가 그런 것처럼 지금의 나도 ‘사교성’엔 여전히 젬병이란다. 물론 너만큼 사람들이 많으면 공황 상태에 빠지는 수준은 벗어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 사이에선 뭔가 늘 불편해 한단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포기해라. 어차피 극복 안 된다. 지금 네곁에 있는 친구 두 명이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친구 두 명이다. 그래도 한 명이 사회 보고, 다른 한 명이 축가 부르니까 썩 나쁘지 않더라. 그리고 가장 예민한 여자 문제… 그래, 솔직히 말하마. 네가 앞으로 겪게 될 상당수의 연애에서 넌 카사노바처럼 능수능란하기는커녕 거의 매번 지질이의 절정 모드일 것이다. 네 바닥을 보고 난 다음, 그 아래 바닥이 또 있음을 반복해서 보게 될 거라는 거지. 나름 안 그러려고 노력해봤는데, 안 되더라. 그리고 매번 참 많이 아프더라. 뭐 어쩌겠니? 그냥 버텨야지. 20년 정도 버티면 예쁜 아내 만나 결혼 잘 하니까 용기를 잃지 말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마. 어차피 서른아홉이 돼도 열아홉, 지금의 너와 큰 차이가 없으니 지금 네가 원하는 너의 모습이 되지 않는다고 너무 스스로를 구박하지 마라. 물론 이렇게 말해도 귓등으로 흘려듣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부디 1993년의 어느 날에 살고 있을 너,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며… 아, 그리고 당부하고 싶은 것 한 가지가 있다. 몇 년 후 할머님 치매 걸리시기 전에 사랑한 다는 말 두 손 꼭 잡고 꼭 해드리렴.B
김진혁
소속 EBS(프로듀서)
수상
2008년 제 20회 한국PD대상 TV교양정보부문 작품상
2008년 <무비위크> 선정 창조적인 엔터테이너 50인
2007 년 제34회 한국방송대상 정보공익부문
2007 년 방송위원회대상 우수상
경력 EBS <지식채널e>
저서 <지식의 권유-사유와 실천 사이에서 고민하는청춘을 위한>, <감성 지식의 탄생>
트위터 @madhy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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